서각과 서예

옥동이서의 초서

성창기 - 한새미 2022. 1. 28. 11:05

 

 

 

 

 

이서의 집안은 원래 북인의 명문가 집안이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몰락, 남인으로 전향했다. 이서가 태어날 때는 정치적으로 남인 세력이 몰락해가는 시기였다. 21세 때 부친이 유배지에서 죽자 그는 관계 진출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이서의 본관은 여주이며 호는 옥동 · 옥금산인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하진이며, 이익의 형으로 관직은 찰방에 그쳤다.

그는 글씨를 잘 써 스스로 옥동체라는 개성적인 서체를 개발하여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허전의 시문집 성재집에서는 동국의 진체는 옥동에서 비롯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옥동체는 이서로부터 시작하여 제자 백하 윤순을 거쳐 원교 이광사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예이론인 비평서 필결(筆訣)’을 남긴 선구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필결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해 서화를 말기(末技)로 간주하던 당시 도학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혁신적인 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필결을 통해 서예를 역리(易理)’와 등치시켜 도학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이서는 글씨는 심법을 궁구해야지 자획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글씨의 외양만 본뜨려는 태도를 경계했으며 특히 심획을 강조하였다. 외형적인 균제미에만 치중하는 조맹부의 송설체와 관청의 서사정식으로 흐른 석봉체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先生於筆法亦深造其妙, 蓋梅山公使燕時, 購王右軍親筆樂毅論以來. 故先生實得力於此也. 大字如 楷體與行書與窠草, 皆眞正正體. 而字愈大而畫愈雄傑, 如銀鉤鐵索, 橫而不錯, 泰山喬嶽, 竣天而特立, 氣勢雄壯, 體像嚴正, 國人得之, 字字寶重, 號爲玉洞體, 東國眞體, 先生實創始, 而其後尹恭齋斗緖, 尹白下淳, 李圓嶠匡師, 皆其緖餘, 而圓嶠嘗曰玉洞筆議論, 不敢到也.

 

선생은 필법에서도 묘처(妙處)에 깊이 이르렀는데, 대체로 매산공이 연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왕 우군의 친필인 악의론을 사온 이후이다. 그러므로 선생은 실제 여기서 필력을 얻었다. 대자(大字)와 해서, 행서 초서가 모두 진정(眞正)으로 정체(正體)이니 글자가 크면 클수록 획이 더욱 웅걸하여 은 구철삭이 가로놓였으나 뒤섞이지 않고, 태산교악이 하늘처럼 우뚝 홀로 서있는 것과 같아서 기세는 웅장하고 체상은 엄정하여 나라 사람들이 이를 얻으면 글자마다 매우 보중히 여기며 옥동체(玉洞體) 라 불렀으니, 동국의 진정한 정체는 선생이 실제로 시작하였으며 그 후로 공재 윤두서·백하 윤순·원 교 이광사는 모두 그 뒤를 이은 사람인데, 원교는 일찍이 말하기를 옥동의 필의론은 감히 도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성재 허전의 옥동의 행장(行狀)에서((출처 : //blog.naver.com/cleanmt2010/220151207309김병 헌의 한국사 이야기, 동국진체는 없다. 정산)

 

동국진체(東國眞體)는 조선만의 고유한 서체를 말하다. 김병헌은 동국진체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한문 문장의 오역 때문에 생긴 결과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선인들은 어느 누구도 동국진체를 언급한 적도 없고 서예사, 고문헌 어디에도 동국진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오세창은 위 성재 허전의 옥동 행장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실었다.

 

行狀曰 筆法亦深造, 其得力於樂毅論. 東國眞體, 實自玉洞始, 而尹恭齋白下圓嶠皆其餘體也.

 

동국의 진체는 옥동에서 시작되어 그 뒤에 공재 윤두서, 백하 윤순, 원교 이광사가 모두 그의 그 뒤를 이어간 사람이다.

-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그리고는 옥동 이서가 조선 후기에 새로운 서체를 창안하고 이를 동국진체라 불렀다라고 풀이 했다.(간송미술관 최완수 학예실장) ‘동국진체의 용어상의 오역이 생긴 것이다. 김병헌은 동국진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 것은 여기서부터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부친인 매산공 이하진이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왕희지의 악의론을 사오자 이서는 이 글씨를 보 고 열심히 익혀 필력을 얻었다. 그래서 대자와 행서초서가 모두 진정한 정체가 되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얻으면 모두 소중하게 여기면서 옥동체라고 불렀다. 그래서 동국의 진짜 글씨는 할아버지 이서 에게서 시작되었으며, 공재나 백하, 이광사도 모두 할아버지를 따라 왕희지체를 썼다.

 

조선의 진정한 글씨는 할아버지 옥동으로부터였지 동국진체라는 새로운 서체를 창안한 것은 아니다. 같은 문집에 실려 있는 정산 이병휴(李秉休:17101776)의 글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跋書帖東國之筆, 以石峰爲巨擘, 其變而中國則自玉洞先生始, 先生刻意右軍神而化之, 一傳而恭 齋, 再傳而白下, 今人皆知黙韓艶王, 先生之功也, 有眼者當辨.

 

발서첩우리나라의 글씨는 석봉을 거벽(巨擘)으로 여겼는데 그것이 변하여 중국으로 된 것은 곧 옥동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선생은 왕우군(王右軍:왕희지)의 정신에 각심(刻心)으로 뜻을 두어 그것을 따랐는데 한번 공재 윤두서에게 전하고 다시 백하 윤순에게 전하였다. 지금 모두 한석봉에 침묵하고 왕희지를 부러워하는 것은 선생의 공이다. 눈이 있는 자는 당연히 분별할 것이다.

 

조선에서는 고려 말에 들여온 송설체와 조선 중기에 혜성같이 나타난 석봉체가 조선 후기 서풍을 주름잡았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연미하고 나약하기만 할 뿐 강철 같은 힘이나 태산교악 같은 기상이 부족한 글씨로 많은 이들이 식상한 상태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일신하고 중국의 글씨 즉 왕희지체로 돌려놓은 사람이 바로 할아버지 옥동이며, 옥동이 왕희지 글씨를 따라 쓰자 공재와 백하가 이를 따라 썼으며, 조선에서 한석봉에게 침묵하고 왕희지를 부러워한 계기는 바로 할아버지의 공이라는 것이다. (김병헌, 앞의 글) 결국 옥동 이서는 조선의 글씨를 버리고 중국 글씨를 썼다는 것이다.

유명한 서가의 글씨를 지칭할 때는 주로 호를 붙여 사용한다. 조맹부의 송설체, 한호의 석봉체, 김정희의 추사체처럼 이서의 글씨도 호 옥동을 붙여 옥동체라고 부르고 있다. 옥동체는 동국진체라는 새로운 서체를 창안한 것이 아닌 자신만의 개성적인 서체를 이르는 말이다.

 

어느 서체도 콘텍스트라하여 자신만의 순수한 창작은 없으며 누구로부터의 영향을 받게 되어있다. 옥동은 왕희지 체를 익혀 여기에 자신만의 개성적이고 천재적인 서체를 개발, 창작해냈다.

 

옥동 이서는 당시 식상해있었던 송설체와 석봉체에 대해 신선한 서체로 새로운 분위기를 일신시켜준, 공재 윤두서, 백하 윤순, 원교 이광사로 이어져 후대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조선의 천재 서예가가 중의 한 사람이다.

 

 

- 인터넷 참조 하였습니다-

 

 

 

 

 

 

 

옥동 이서의 초서 두목의 시 장안추망長安秋望

출처 : 성호기념관

 

樓倚霜樹外(누의상수외)

鏡天無一毫(경천무일호)

南山之秋色(남산지추색)

氣勢兩相高(기세양상고)

 

누각은 서리 내린 나무 저만치에 서있고,

거울 같은 맑은 하늘 티끌 한 점 없구나.

남산에 서린 가을빛

그 기세 함께 드높구

 

부친 이하진은 연행에서 많은 서적을 구입해 왔다. 이서는 이 책을 통해 서예에 관한 많은 이론과 실기를 제공받았는데 특히 왕희지의 해서 낙의론(樂毅論)에서 그 필력을 얻어 자신만의 옥동체를 개발해냈다.

 

 

 

 

서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화선지에 연습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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