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寒賜浴華淸池 춘한사욕화청지
溫泉水滑洗凝脂 온천수골세응지
侍兒扶起嬌無力 시아부기교무력
始是新承恩澤時 시시신승은택시
날씨 차가운 봄날 임금님 온천에서 목욕하게 되어
매끄러운 온천물에 희고 고운 살결 씻어냈네.
시녀들이 부축해 줄 때 힘없는 듯 교태부리니
이로부터 임금님 은총을 받는 계기가 되었네.
* 華淸池 : 長安(현재의 西安) 驪山(여산) 기슭에 있는 華淸宮(화청궁) 안에 있는 황제전용의 온천.
황제전용 온천이므로 황제가 특별히 허락했다는 뜻으로 賜浴(사욕)이라 한 것이다.
* 凝脂 : 응고된 기름덩어리처럼 희고 고운 楊貴妃의 피부를 나타낸 것.
* 侍兒 : 貴妃의 어린 侍女.
* 新承恩澤 : 楊貴妃가 처음으로 황제의 은총을 입어 동침하게 된 것을 말함.
* 玄宗황제가 寵愛(총애)하던 王妃 武惠妃:무혜비(壽王의 生母)를 사별하고 너무나 상심해 하자,
간신 高力士 등의 책략으로, 재색겸비의 楊貴妃를 脫俗(탈속)시켜서(22세때) 도교의 道士(도사)로
만들어 궁중의 太眞宮(태진궁)에 머물게 하다가, 24세때 貴妃로 책봉하였음.
* 楊貴妃를 羞花美人(수화미인)이라 할 정도로 그녀가 미모의 소유자였겠지만,
정작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웃는 모습이 아름답고 매력적인데다가,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고 춤 솜씨도 일품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玄宗은 다재다능해서 직접 서역(西域)의 음악을 모방한 <霓裳羽衣曲:예상우의곡>이란 곡을 만들어 연주하게 하며
궁중 여인들에게 춤을 추도록 했는데, 楊貴妃의 춤에 현종이 제일 만족해했다고 한다.
* 백낙천 자신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지었다고 하는 신악부(新樂府) 50首 중의 하나인,
호선녀(胡旋女)란 시의 내용을 보면, 서역에서 들어온 남녀가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호선무(胡旋舞)라는 춤이 있는데,
그 춤을 제일 잘 추는 사람으로, 여자는 楊貴妃, 남자는 安祿山을 거명하면서,
두 사람의 호선무(胡旋舞)에 임금이 마음을 뺏겨 나라를 망치게 된 것을 한탄하는 내용이 있다(...貴妃胡旋惑君心...).
雲鬢花顔金步搖 운빈화안금보요
芙蓉帳暖度春宵 부용장난도춘소
春宵苦短日高起 춘소고단일고기
從此君王不早朝 종차군왕부조조
꽃다운 얼굴 구름 같은 머리에 금빛 머리장식 흔들며
연꽃무늬 휘장 따뜻한 방에서 임금님과 함께 봄밤을 보내네.
봄날의 밤은 너무 짧아서 해가 높이 떠오른 후에야 일어나니
이때부터 임금님은 아침조회를 열지 않게 되었네.
* 步搖(보요) : 부녀자들의 머리장식. 윗부분에는 꽃, 새 등을,
아랫부분에는 구슬을 매달아서 움직이면 흔들리게 되어있다. 금으로 된 것이 금보요(金步搖).
* 芙蓉帳(부용장) : 연꽃무늬가 새겨진 휘장
* 苦短(고단) : 짧은 봄날의 밤을 원망하며 일어나기 싫어하는 모양. (苦:怨恨)
* 早朝(조조) : 아침 조정회의에 참석하여 대신들로부터 국정을 보고받고 지시하는 일.
* 長恨歌의 또 한사람의 주인공인 현종:玄宗(李隆基:이융기 : 685-762)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의 할머니이자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인 즉천무후(則天武后)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玄宗을 唐(당)의 6번째 황제라 하지만, 실제로는 10번째 황제라고도 할 수 있다.
3번째 황제인 고종 때부터 50여년간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른 則天武后에 의해서 황제 자리가 여러 번 갈렸기 때문이다.
高宗 이후 玄宗까지 황제 자리의 변천을 간단히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唐 高祖-->太宗(李世民)-->高宗-->中宗-->睿宗-->則天武后(周)-->中宗-->(李重茂,溫王)-->睿宗-->玄宗(李隆基)
則天武后는 원래 太宗의 후궁이었는데, 太宗의 아들인 高宗의 눈에 들어 연애하다가 太宗이 죽고 高宗이 즉위하자 그의 후궁을 거쳐 皇后가 되었고, 남편 高宗이 죽은 후에는 太后가 되어 자기가 낳은 제7왕자 中宗(李哲)을 즉위시켰다. 武后는 高宗 재위시절에도 병약한 高宗을 대신해서 국사를 전담했었다. 그녀의 아들 中宗이 즉위하자 이번에는 며느리인 중종의 부인 韋皇后(위황후)가 則天武后처럼 득세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즉위 58일 만에 中宗을 퇴위시키고 그 밑의 아들 睿宗(예종:李旦)을 세웠다. 그러나 예종은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했고 則天武后가 모든 권한을 행사하다가, 드디어 자기 자신이 중국 역사상 唯一無二(유일무이)한 女皇帝(神聖皇帝)까지 되면서 국호도 周로 고쳤었다. 그 則天武后가 82세로 늙어 죽게 될 무렵, 세력이 약해지자 신하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中宗을 황제로 다시 세우고, 나라 이름도 唐으로 환원되었다. 그 中宗의 왕후인 韋皇后(위황후)가 이전부터 시어머니 則天武后처럼 女人天下를 만들고자 했었다가 실패했었는데, 中宗이 다시 황제가 되고 則天武后도 죽자, 다시 권력을 휘어잡기 시작해서, 결국 남편인 中宗을 독이 든 만두로 시해하고, 자기의 4째 아들인 이중무(李重茂)를 황제로 세웠다. 그리고 자신이 태후로서 섭정을 하고자 했는데, 이 꼴을 보다 못한 황족 李隆基(이융기: 예종의 셋째 아들)가 정변을 일으켜서 큰어머니인 위태후(韋太后) 일파를 제거하고, 자기 아버지 睿宗을 황제로 내세웠다가 양위(讓位)를 받아 스스로 황제가 된 것이다. 8일만에 황제 자리에서 쫒겨난 溫王 李重茂는 황제시호를 받지 못하고 물러난 듯 하다.
玄宗은 용모가 수려하고 영특했으며, 음악과 서예 등 모든 면에 뛰어나서, 당 왕조의 전성기를 누리기에 가장 적합한 天子였다고 한다. 음악적인 재질도 뛰어나서 霓裳羽衣曲, 新曲 40余曲 등을 편곡하거나 직접 제작했으며, 궁중에 梨園(이원)이라는 음악교습소를 두고 수백명의 梨園弟子(이원제자)들에게 직접 笛(피리) 등 음악을 가르쳤다 한다.
현종황제는 서예도 名筆이어서 泰山 정상 부근의 바위 절벽에 쓴 1008字의 紀泰山銘이란 황금색 글씨가 있는 <唐磨崖(당마애)> 라는 곳은 태산관광에서는 빼놓을 수없는 명소로 되어 있다.
꺼져버릴 번했던 당 왕조를 되살려 30년간의 <開元之治:개원지치> 태평성세를 이룩해 놓은 후 정치에 염증을 느낀 듯, 천하절색 양귀비를 데리고 인생을 즐기다가 운이 다했는지, 총애하던 安祿山(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 와중에 양귀비를 잃고 쓸쓸한 여생을 보내서, 50년 후에 나타난 白居易에게 <장한가>의 소재거리를 제공해 주고 만 것이다.
玄宗의 할머니 則天武后는 太宗의 후궁이었다가 그 아들 高宗의 황후가 되어 父子를 남편으로 삼은 셈이고, 양귀비는 수왕(壽王)의 부인이었다가 그 아버지 玄宗과 살아서 결국 父子를 남편으로 섬긴 것이 되니, 당대 두 미녀의 공통적인 운명 같은 게 있었다고 할까?
국전지에 초서로 쓴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