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각과 서예

초서 한시 - 3

성창기 - 한새미 2021. 7. 20. 13:57

 

요즈음 서실에 가면 초서로 된 한시를 한편씩 쓰고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초대작가가 되면

초서로 반야심경을 써서 서각을 하고 싶은 욕심에 ..............

그리고 또 시간이 허락 한다면 전시회도........

 

 

 

 

馬耳山(마이산) _ 만보당 김수동(晩保堂 金壽童, 1457~1512)

 

馬耳雙尖揷太空 (마이쌍첨삽태공)

雲開突兀露秋容 (운개돌올로추용)

似聞絶頂神湫在 (사문절정신추재)

鼓角何能試老龍 (고각하능시노룡)

 

마이산의 우뚝한 두 봉우리는 하늘 위에 솟았고

구름 걷혀 뾰족한 바위에는 가을빛이 어리어 있다.

소문을 들으니 깎아지른 산마루에 못이 있다고 하니

북치고 나팔을 불어서라도 늙은 용을 시험해 볼 수는 없을까?

 

 

 

 

 

渭川漁釣圖(위천어조도) - 김시습(金時習)

 

위천에서 낚시하는 그림

 

 

 

 

風雨蕭蕭拂釣磯(풍우소소불조기) : 비바람에 날이 쓸쓸하여 낚싯대를 떠나니

渭川魚鳥識忘機(위천어조식망기) : 위천의 물고기와 새들도 알아보고 미끼를 문다.

如何老作鷹揚將(여하노작응양장) : 어찌하여 늙어서도 매처럼 용맹을 떨쳐

空使夷齊餓採薇(공사이제아채미) : 백이숙제로 하여 헛되이 굶어죽게 하였나.

 

 

 

夷齊(이제) : 伯夷 와 叔齊를 일컬음.

 

 

 

 

 

 

 

韓山客館 한산객관

김자수 金自粹

 

東國文章集大成 (동국문장집대성) 우리나라 문장가는 그 누구인가

稼亭父子冠群英 (가정부자관군영) 가정 부자가 그 중에서도 뛰어나네.

山川盈秀今猶古 (산천영수금유고) 산천은 그때나 다를 바 없는데

且問何人從姓名 (차문하인종성명) 그 뒤를 이을 사람 그 누구인가?

 

 

參考事項- 한산에서 출생(出生)한 이 곡과 이 색 부자의 뛰어난 문장을 기린 시이다.

 

김자수 金自粹

본관 경주. 자 순중(純仲). 호 상촌(桑村).

 

 

 

 

 

기무열사(寄無說師) -김제안(金齊顔) ? - 1368

무열스님에게

 

世事紛紛是與非 (세사분분시여비)

세상사 분분하게 시비가 어지러워

十年塵土汚人衣 (십년진토오인의)

마음과 몸덩이에 십여년 먼지썼네

落花啼鳥春風裏 (낙화제조춘풍리)

봄바람 지는꽃과 새소리 한창인데

何處靑山獨掩扉 (하처청산독엄비)

어느산 스님홀로 문걸고 계시나요.

 

분분(紛紛) ; 몹시 소란하고 어지러운 모양. 어지러운 모양이 끊임없음.

진토(塵土) ; 흙먼지. 기구(起句)의 분분시비를 받으면 홍진의 썩은 명리다.

인의(人衣) ; 사람이 입은 옷으로 풀기도 하겠지만 사람과 옷, 즉 안과 밖을 의미.

표리(表裏)의 시적(詩的)표현으로 봐 마음과 몸으로 푼다.

제조(啼鳥) ; 새가 조잘거리는 모습을 썼다. 여기서의 제(啼)는 말미의 리(裏)와 어울려

약간 들뜬 봄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춘풍리(春風裏) ; 춘풍(春風)은 ‘봄바람’이라는 명사. 춘풍리 하면 바람의 속내를 섞어

봄바람이 하는 짓. 즉 동사역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떨어지는 꽃잎이

지저귀는 새소리와 함께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독엄비(獨掩扉) ; 홀로 독, 가릴 엄, 문짝 비. 누군가로부터 전혀 간섭받지 않는 독립된

공간이 보이고 그 공간을 또 혹여 누군가 기웃거릴 것을 우려하여

빗장을 걸었다. 하여 청산(靑山)은 푸른산이 아니고 푸르게 보일만큼

깊은 산이다.

 

김제안(金齊顔)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현(仲賢). 방경(方慶)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상락군(上洛君) 묘(昴)이며,

성균직강(成均直講)을 지낸 구용(九容)의 아우이다.

 

 

 

 

 

 

[한시] 北征(북정) - 南怡(남이)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석마도진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수음마무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백두산 돌을 칼 가는데 다 없애고
두만강 물을 말 먹여 다 없앴네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 한다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말하리.

 

[해설]
대장부의 드높은 기상이 돋보이는 시이다.
이 시는 뒷날 예종 때에 유자광에 의하여 무고 당하였다.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을
男兒二十未得國 (남아이십미득국)으로 고쳐서 모반을 도모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이 때문에 남이는 28세의 나이에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유 자광과 그의 아들도 귀양가서 죽었다.

 

[남이의 죽음]
백두산 돌은 칼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물도 말 먹여 다 말리겠다던 남이!

그러나 그는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과 업적을 오히려 시샘하던 당시의 모리배(謀利輩)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유자광(柳子光) 일파의 음모와 참소(讒訴)에 의해 남이 자신은 물론 그의 어머니마저 음모와 죽임의 회오리바람에 휩싸여 처형된다.

 

오랑캐와의 수 차례 전쟁에서 공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른바 역모(逆謀)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형장의 이슬이 된 것이다.
1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기도 했던 그는 북방 오랑캐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는 등 공훈을 세워 26세 나이에 병조판서가 되었지만, 예종이 즉위하자 마자 곧 유자광의 조작과 계략적인 참소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한지 얼마 안되어서 어느 날 밤,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가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했다.

이것을 들은 유자광이 돌려 쳐서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예종에게 고해 바쳤다.

세조 때부터 남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예종은 기회는 이때다 생각하고, 남이를 제거해버린 것이다.
남이 뿐이었으랴! 예종과 유자광 일파는 이 '역모사건'을 계기로 해서 강순·조경치·문효랑 등 춘양군(春陽君:효령대군의 3남)과 관련된 인물도 모두 죽이고, 남이의 장인과 어머니를 위시하여 그들의 심복인 조영달·이지경 등 25명을 모조리 죽이는 등 살육판을 확대시킨 것이다.

 

[남이 南怡(1441~1468)]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 의령(宜寧). 시호 충무(忠武). 태종의 외손(外孫)이다.
1457년(세조3) 약관의 나이로 무과(武科)에 장원,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1467년(세조13) 이시애(李施愛)가 북관(北關)에서 난을 일으키자 우대장(右大將)으로 이를 토벌,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오르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으며 이어서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고 28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예종때‘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왜곡되여, 반역의 뜻이 있다고 모함받아 영의정 강순(康純) 등과 함께 주살(誅殺)되었으나,1818년(순조18) 관작(官爵)이 복구되었다.

 

출처:NAVER백과사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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