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각과 서예

세한도 서각(2) 완성

성창기 - 한새미 2021. 4. 12. 16:59

 

 

세한도를 서각하기 위하여

충남 예산에 있는 추사 고택에 전화하여 영인본을 구입

느티나무에 배접하였습니다.

 

1월1일  새해에 공방에서 추운날씨에

영인본을 바로 붙혔습니다.

 

세한도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일본 동경 우에노(上野)에 살고 있던 후지스카 지카시(藤塚隣)로 부터 '세한도(歲寒圖)'를 손에 넣은 서예가 손재형은 당대의 석학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정인보와 이시영 그리고 오세창에게 '세한도'를 보이고 이들로 부터 발문(跋文)을 받는다.


이 3명의 발문(跋文)은 '세한도'에 바쳐진 마지막 배관기(拜觀記) 즉, ‘절하면서 보았던 기록’이다.

그 앞에는 한때 그림을 소장했던 김석준과 청나라의 명사 16명이 '세한도'를 보고 남긴 감상들이 줄줄이 붙여져 있었다.

그래서 '세한도'를 다 펼치면 길이가 무려 14m에 달한다.

물론 이 길디 긴 화폭에 처음으로 글씨를 쓴 이는 김정희 본인이다.

 

 

'세한도(歲寒圖)'라고 예서체로 쓴 제목 옆에는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우선(藕船)'은 이상적(李尙迪, 1803~1865)의 호(號)로, 이 글은 "이상적(李尙迪)은 이 그림을 감상하시라"는 의미로 이 '세한도'가 이상적(李尙迪)을 위해 그려졌다는 김정희 본인의 선언이다.

그럼 이상적(李尙迪)은 어떤 이유로 '세한도'의 주인공이 됐던 것일까?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로 부터 그 사연을 풀어가 보자.

 

 

추사 김정희는 평소 중국 북경을 가 보고 싶어했는데 마침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가사신으로 뽑히자 1809년 당시 24세의 나이로 사신 수행원으로 자원하여 압록강을 넘어 청나라 당대의 대학자 완원(阮元)과 사제 관계를 맺었다.김정희의 아호는 72가지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완당(阮堂)'이라는 호는 '완원(阮元)'의 제자임을 뜻하는 것이다.

 

 

 

또 당시 금석학(金石學)의 1인자였던 옹방강(翁方綱)의 초대를 받아 그가 모으고 보유했던 진귀한 자료를 직접 대면했을 때 김정희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본 느낌이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후 김정희는 3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1830년, 김정희 나이 45세에 그의 탄탄대로에 결정적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데 윤상도의 옥사에 아버지 김노경이 연루돼 고금도로 유배된 것이다. 이는 집안의 기둥이 부러지는 충격이었고 아버지는 유배지에서 돌아온 후 머지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1840년 그의 나이 54세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10년 전 아버지를 옭아맸던 윤상도 사건의 책임론이 또 다시 불거지면서 김정희는 그만 제주도로 귀양길에 오르고 만 것이다.

제주도로 귀양 온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는데 배가 들어오는 편에 책이 부쳐져 왔다는 것이었다. 책을 보낸 이는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으로 김정희가 오래 전부터 탐해 마지 않던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庫)>였다.

 

뜻밖의 책 선물을 보내준 제자이자 문우(文友)인 이상적(李尙迪)에게 어떤 보답을 할까 생각하던 김정희는 어느 날, 평소보다도 정성스럽게 먹을 갈고 종이를 편 후 "오늘 이 마음을 담으리라." 다짐하고 필치 하나, 획 하나에 정신을 쏟아부으며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나갔다.

 

 

 

그는 평소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라는 표현을 즐겨 썼는데 이는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이라는 뜻으로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으면 그것이 그림과 글씨에서 드러난다는 뜻이었다.

"평생 열 개의 벼루를 밑창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네." 라고 자랑했던 김정희는 필생의 붓놀림으로 '세한도'를 완성하고나서 그림만으로는 모자랐던지 다시 손목을 바로 하고 아래 글을 한 자, 한 자 써내려 갔다.

 

 

 

소나무 두그루와 잣나무 두그루

그리고 맛배지붕의 허룸한 집한채

 

비록 만물이 숨을 죽이고 흰 눈이 세상을 덮은 겨울이라 하더라도 온 세상의 한 켠에서 푸르름을 잃지 않으리라는 선비로서, 귀양객으로서 그리고 자존심 드높은 지식인으로서의 결의가 '세한도'에 담겨 있었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각각 두 그루인 이유 즉 '세한도'의 주인공은 이상적(李尙迪)이면서 김정희였다.

이윽고 김정희는 왼쪽 하단에 붉은색, 즉 한 조각 붉은 마음을 드러내듯 '장무상망(長毋想忘)'의 낙관을 찍는다.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기를.”

바다를 건너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한 장의 종이, 그에 담긴 글과 그림 앞에서 이상적(李尙迪)은 감격하여 몸을 떨며 답신을 쓴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초연히 빠져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으로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추사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의 고마움에 대하여 쓴 발문

 

계복(桂馥)의 만학 집(晩學集)과 운경(惲敬)의 대운 산방 문고(大雲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주고, 올해 또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 경세 문 편(皇朝經世文編) 120권을 보내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지난해(去年)에 만학과 대운을 부쳐주고(奇來)

또 올해(今年)에  우경문편(蕅畊文編)책을 천만리 먼길에서 일시에 구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해를 거쳐 구하고 부쳐준 사실에 감탄하여

 

이 모든일이 세상의 도도함이 오직 권세(惟權利)와 이익(費心費力)을 추향해 일삼는데

마음 씀씀이 이 같이 권리로 돌아가지않고

이에 바다 밖의 한 초췌히 메마른 사람(海外蕉萃枯槁之人)에게 돌아옴이 라고 고마워 하고

이는 세상의 권리를 추향하는자 같지 않고(超權利者)

 

태사공이 말하기를(太史公云) 권리로 이어진자(權利合者)는 권리가 다하면 (權利盡而) 사귐이 소원해 진다고 하는데(交疏君亦) 공이 그러하지 아니함은 태사공의 말이 잘못 되었단 말인가?

 

 

 

 

 

그 다음

 

공자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연후에 솔과 잣의 나중에 시듬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하였으니 송백 이는 사철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 것으로 세한 이전에도 한결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한결의 송백인데 성인은 특히 세한 이후를 일컬고 지금 군의 나에 대함이 전부터도 더한 것이 없었고 이후로 말미암아도 덜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성인(공자)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 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시들지 않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주말만 조금씩 하니 약 3개월이 걸렸네요.

 

채색을 하여야 하는데

수묵화의 느낌이 나도록 하여야 하는데

어떻게 하여야 할까?

조금 고민 하여야 겠네요

 

 

이 세한도를 초묵법으로그리고

갈필로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당나라 이후 수묵은 채색에 이어 동양화의 주요 재료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먹 한 가지로 평면상에 입체감을 나타내는 데에는 처음부터 많은 제약이 있었죠.

이 같은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오랜 세월동안 수묵화 기법이 개발되고 발전됩니다.

 

수묵화 기법은 먹을 이용해서 다양한 표현을 하는 용묵법,

붓을 사용해서 다양한 효과를 내는 용필법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용묵법에는 선염, 파묵, 발묵 등의 기법과 먹색에 따른 초묵, 농묵, 담묵 등의 구분이 있습니다.

 

용필법은 갈필, 백묘, 준찰 등 전반적인 수묵화에 사용되는 기법 이외에 부벽준, 피마준, 하엽준 등 주로 산의 입체적 표현을 위해 고안된 기법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초묵, 농묵, 담묵

 

사용하는 먹의 되기, 즉 농도에 따라 구분하는 용어로 초묵(焦墨)은 아주 짙은 먹색을 가리킵니다.

적묵(積墨)과 비슷한 기법이지만 적묵은 마른 붓으로 여러 번 칠해 (쌓아) 짙은 먹색을 내는 것으로 초묵과는 조금 다르다.

먹을 갈아 반나절 정도 시간이 지나면 수분이 증발하여 진해지는데 이 때의 먹색을 초묵이라고 말합니다.

 

농묵은 초묵 다음으로 진한 먹색을 뜻하며 담묵은 먹물에 물을 많이 섞을 것을 가리킵니다.

 

선염(渲染)은 수묵 표현의 한 방법으로 담묵이나 옅은 색채를 점차 엷게 칠하거나 점차 짙게 칠하는 등 점층적으로 사용하는 표현법을 가리킵니다.

영어의 그라데이션(gradation)과 의미가 같습니다.

선염에서 먹의 농도에 따른 짙고 옅어지는 효과를 통해 원근과 입체감을 나타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말로 '바림'이라고 하는데, 선묘 이외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수묵 기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와같은 동양화 기법은 적용이 안되고

그냥 검은색을 이용하여

칠하는 방법을 선택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검은색 칠 하여 완성 하였습니다.

 

 

 

 

 

 

즉  세한도의 주인공은 이상적이면서 김정희였다. 세한도를 창조한 것은 김정희였으나 그 원천을 제공한 것은 이상적이었고, 이상적에게 감사한 만큼 김정희는 자신을 가다듬었다. 이상적의 배려와 김정희의 감응이 희대의 걸작을 창조해 낸 것이다. 이윽고 김정희는 왼쪽 하단에 붉은색, 즉 한 조각 붉은 마음을 드러내듯 장무상 망(長毋想忘)의 낙관을 찍는다. “오랫동안 잊지 마세나.”

 

바다를 건너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한 장의 종이, 그에 담긴 글과 그림 앞에서 이상적은 몸을 떨며 감격한다. 그의 답신이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초연히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으로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오주석 저)

 

 

 

허룸한 집한채

소나무 두그루와 잣나무 두그루

이는 무엇을 표현 하였을까?

 

김정희는 이상적을 두고 “성인에게도 일컬음을 받을 만하다.”라고 극찬하며 감사해하며 그림 속의 소나무와 잣나무를 이상적의 일관된 선의에 비겼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자신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비록 만물이 숨을 죽이고 흰 눈이 세상을 덮은 겨울이라 하더라도 온 세상의 한편에서 푸르름을 잃지 않으리라는 선비로서, 귀양객으로서, 그리고 자존심 드높은 지식인으로서의 결의가 세한도에는 담겨 있었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각각 두 그루인 이유다.

 

 

 

추사는 발문을 추사체로 쓰지 않고

구양순의 해서楷書로 또박또박 정성드려 썼다

 

 

 

 

 

 

 

다시 <세한도>가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로 돌아가 보자. 앞서 말했듯 손재형은 세 명의 명사에게 세한도를 보이고 배관기를 청했다. 이시영, 정인보, 오세창. 그 가운데 오세창의 경우 감회는 더욱 충만하였을 것이다. 오세창은 역관 가문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 아버지 오경석이 바로 이상적의 제자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사부의 사부 김정희가, 아버지의 사부 이상적이 함께 그려내고 완성했다 할 세한도 앞에서 오세창은 과연 어떤 심경이었을까? 오세창은 이런 표현으로 그 마음을 표현한다.

“마치 황천에 갔던 친구를 다시 일으켜 악수하는 심정이다. (譬如起黃泉之親朋 而握手焉)” 아마도 그 순간 황천에서 시를 나누고 있을 우선 이상적과 추사 김정희도 몸을 일으키며 함께 웃었으리라. “스승님. 세한도가 제 있을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군. 참으로 다행한 일이네. 자네가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읊조린 시가 기억나는군. ‘평생에 나를 알아준 건 수묵화였네. 흰 꽃심의 난꽃과 추운 시절의 소나무’ (知己平生存水墨 素心蘭又歲寒松) 이제 추운 시절은 끝내고 저 소나무들도 따스한 날들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는가.”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글씨를 예서체로 쓰고

은행나무를 구하여 배접하고

 

양각으로 새길려고 합니다.

 

 

 

위 두개가 한쌍으로 움직여야 할 것 같네요

 

 

 

 

양각으로 새김질 하고

 

 

 

들레에 대고

 

 

 

커피색으로 칠하고

 

 

 

글짜의 깊이가 약 2센치정도 됩니다.

 

 

 

 

세한도 위에 올려 보고

 

반야심경도 같이

 

 

 

 

 

노송도 위에 올려 놓고 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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